참이름소개

언론출연

풍수의 땅 만수동과 성밖숲(대구매일신문 2008.5.26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542회 작성일 10-07-20 18:09

본문


[상생의 땅 가야산](45) 풍수의 땅 만수동과 성밖숲 
 

 정감록.비결서마다 "천혜의 피난처.길지"

 
 
  20080523_152200000.jpg
  20080523_152200002.jpg
  20080523_152200003.jpg
대륙과 해양을 잇는 반도(半島)라는 지리적 환경 탓인가, 아니면 무(武)보다는 문(文)을 숭상, 스스로를 지킬 힘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우리 민족은 유달리 외침에 시달렸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륙에서 438회, 해양에서 493회 등 모두 931회에 이르는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략 2년에 한 번꼴로 전란이 있었던 셈.

전란은 무엇보다 민초들에게 커다란 희생을 강요했다. 전쟁이 나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굶주리며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고, 기아와 전염병 등으로 귀중한 목숨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무기나 싸움으로 사망하는 것보다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양민들이 희생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런 연유로 민초들에겐 기근과 역병, 전란 등 삼재(三災)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이상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란이 나면 현실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피란처이기도 했다. '십승지(十勝地)'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됐다. 조선 중기의 예언가 남사고(南師古)는 '산수십승보길지지'에서 기근, 역병, 전란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는 열 곳의 땅을 언급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술가(術家)들이 지목한 십승지로는 풍기의 금계촌, 안동의 내성, 보은 속리산 아래 증항 근처,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예천의 금당동, 공주의 유마지방, 영월의 정동 상류, 무주의 무풍동, 부안의 변산, 성주 가야산의 만수동이 꼽히고 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보듬어주는 만수동과 태평동!

성주군 가천면 옥계(포천계곡)와 나란히 달리는 903번 도로를 따라 신계리로 향한다. 십승지의 하나로 꼽히는 만수동을 찾아가는 길이다. 신계리를 지나 마수리로 가는 도로를 달리다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곰실(熊谷)로 올라간다. 가천면 마수리에 속한 곰싯골 뒷산이 만수동이다. 신계리~마수리 포장도로에서 꼬불꼬불 10여분을 달려 만수동에 닿았다.

만수동(萬壽洞)은 옛날부터 정감록(鄭鑑錄)과 여러 비결에 자주 언급됐던 곳. 가야산 동북의 만수동은 난세에 병화를 입지 않는 복지라 전해오고 있다. 감여가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여말과 한말에는 은사들의 입산도 많았다. 만수동은 부족 성읍국가 시대에는 수동(壽洞)으로 불렸고 지금의 마수동(馬水洞)은 1895년 고종 때 만수동을 고쳐 지은 이름이다.

만수동 답사길에 동행한 풍수지리 전문가인 홍승보 명인역학 원장은 만수동을 십승지로 꼽힐 만한 '길지'라고 했다. "만수동 뒤편으로 태조산에 해당하는 가야산과 탐라목성인 현무봉이 자리를 잘 잡았고 좌청룡과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들의 형세도 빼어나군요. 무엇보다 만수동은 그 안의 생기(生氣)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관쇄가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물이 흘러나가는 파구(破口)가 곧바로 밖으로 연결되지 않고 산자락으로 둘러싸여 만수동의 생기를 잘 간직하고 있다는 얘기다. 만수동에서 바라보는 안산도 좋은 형세를 갖고 있다고 홍 원장은 덧붙였다. 만수동 중앙으로 흐르는 계곡은 맑은 정기를 간직하고 있다.

옛 기록에도 만수동은 "난세에 몸을 보전할 땅" "복을 듬뿍 주는 길지"로 언급돼 있다. '성주군지' 가천면 마수조(條) 기록을 보면 "마수리는 남쪽으로 수륜면과 인접하고 서남쪽으로는 가야산 상봉으로 이어지는 가야산의 아랫자락으로서 예부터 병란을 피하고, 생리의 덕이 있는 명지의 일처로 일컬어져 만수동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예부터 난세에 많은 은사들이 이곳을 수양처로 삼아 정착하였던 것이다"고 했다. 또 곰시조에는 "가야산 산봉의 동북쪽의 가파른 산언덕 아래 자리한 마을로서 마수 마을과 더불어서 천혜의 피병지이며, 난세의 은거지로 알려져 있다"고 적혀 있다.

만수동은 북쪽을 바라보고 앉았지만 햇볕이 잘 드는 등 그 터에는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산들이 막아주고, 하루 종일 햇빛이 비쳐 쌓인 눈이 잘 녹는다는 것. 현재 만수동에는 1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홍 원장은 "옛 기록에 나오는 만수동은 이 곳을 중심으로 사방 78㎞(200리)를 일컫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수륜면에 있는 태평동(太平洞)은 가야산의 4절(四絶) 가운데 동쪽에 해당되는 곳이다. 나머지 세 곳은 백운동(남), 해인사(서), 옥류천(북) 등을 일컫는다. 태평동을 찾아가려면 성주읍에서 수륜면으로 가는 33번 도로를 따라 가다 면소재지 조금 못 미쳐 봉양리로 접어들면 된다. 봉양리를 지나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차량으로 20분 정도, 다시 걸어서 20분 정도를 오르면 태평동이 나온다. 태평동은 만수동에 버금가는 길지로 알려져 있다. 고려 말 개성판윤을 지낸 박가권은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태평동에 초옥을 마련하고 고려 500년 사직의 허무함을 달래고 수없이 찾아오는 은사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보냈다. 태평동 입구의 큰 바위에는 그가 새겼다는 불이문(不二門)이라는 글씨가 있다.

풍수지리가 곳곳에 스며든 땅, 성주

19세기 후반 성주의 지식인 도한기(都漢基)는 '읍지잡기(邑誌雜記)'에서 성주의 읍터와 안산을 이렇게 묘사했다. "본 고을의 읍내는 와우형(臥牛形)이다. 안산을 성산이라고 이름한 것은 소가 별을 보며 누워 있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성주이기에 당시 사람들은 풍수에 따라 그에 걸맞은 조치를 취했다. 길한 존재인 소를 붙들어 두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한 것. 예를 들어 초전동(草田洞)이라고 한 것은 소가 풀을 보고 가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 또 안산에 해당하는 성산은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복호형(伏虎形)이어서 소가 달아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풀이했다. 이천(伊川)이 돌아나가는 성주읍의 수구(水口)에 해당되는 갈막에는 가축을 도살하는 움막집을 둬 소가 성주읍을 벗어나는 것을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성주읍 예산리에 있는 동방사지 7층 석탑은 성주의 지기가 냇물과 같이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진 지기탑(地氣塔)이라고도 한다.  

또한 성주의 명소가 된 성주읍 경산리 성(城)밖숲도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조성된 곳이다. 이천가를 따라 성주읍성 밖에 만들어진 이 숲에는 300~500년생 왕버들 57그루가 자라고 있다. '경산지' 및 '성산지'에 성밖숲을 만들게 된 사연이 나온다. 성밖 마을의 아이들이 이유 없이 죽는 등 여러 흉사가 이어지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숲을 조성했다는 것. 마을의 풍치와 보호를 위한 선조들의 전통적 자연관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홍승보 원장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성밖숲은 음과 양의 기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성밖숲은 노거수 왕버들로만 구성된 단순림으로 학술적 가치도 높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의 풍수지리 및 역사와 문화, 신앙에 따라 조성되어 마을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과 토착적인 정신문화의 재현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전통적인 마을 비보림(裨補林)으로 향토성과 역사성을 가진 숲이라 부를 만하다. 요즘에 성밖숲은 성주참외축제 등 크고 작은 행사를 하는 공간은 물론 아이들의 소풍 장소, 주민들의 산책 및 운동 공간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한창 녹음이 짙어가는 성밖숲을 걸으니 후인들을 위해 숲을 만든 선조들의 사랑과 지혜가 새삼 가슴에 와닿았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신문기사 바로가기

클릭☞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3543&yy=20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